신비의 샴발라
감사와 공경

음악 [kpop]

산울림 [지금봐도 전설]

금강 반야 바라밀 2022. 10. 11. 02:45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 형제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록밴드이다.

1977년 <산울림 새노래 모음>로 데뷔했으며, 대한민국 대중 음악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밴드로 평가받는다.

서울대학교 2명(김창완, 김창훈)[1]에 고려대학교 1명(김창익)[2]의 가족밴드다.

산울림 삼형제는 어릴 적에 주말마다 방에 계란판을 붙여서 방음실로 만들고 싸구려 기타로 자기들이 만든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3] 이후 1977년에 MBC 대학가요제가 처음으로 개최된다고 하여 삼형제가 무이(無異, 평소와 다름없음)[4]라는 밴드로 대학가요제에 참가한다. 당시 김창훈은 샌드페블즈 5기 멤버(75학번)로 있었는데, 샌드페블즈 6기(76학번)에게 바톤 타치하고 무이로 들어오면서 자작곡 "나 어떡해(이 곡은 산울림 2집에 리메이크되어 다시 실린다)" 를 샌드페블즈에게 주었다.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산울림 1집 수록곡)" 로 1위, 샌드페블즈는 "나 어떡해"로 2위를 기록했는데 김창완이 1975년 졸업생이라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규정에 걸려서 무이는 결국 탈락하고 제 1회 MBC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샌드페블즈가 탔다. 이후에 "나 어떡해"가 김창훈이 쓴 곡임을 알고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삼형제는 프로페셔널한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이제 사회 생활을 할 나이가 되었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을 마지막으로 기념하는 의미에서 음반 제안에 응했고 이렇게 해서 산울림 1집이 나왔다. 이때 레코드 판이 40만 장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대박이었다고 한다. 이후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5위에 뽑혔다. 참고로 6위가 산울림 2집이다.[5]

초기(1~3집)에는 펑크 록 느낌의 디스토션이 강한 공격적인 사운드를 많이 보여줬는데 이 스타일은 영미 록의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 성향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어떠한 선대 록 음악의 성향도 받아들이지 않은 산울림만의 독창적인 작법이었다. 실제로 삼형제는 데뷔 전 대학 그룹 사운드가 흔히 하던 카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부터 작곡에 몰두 데뷔 시점에 이미 상당한 분량의 창작곡이 있었다.[6] 산울림의 초반이 그야말로 전설로 남게 된 것은 미숙한 실력과 부족한 장비를 가지고도 도달하였던 파격에 가까운 독창성 때문이다.[7] 오로지 외국 음악 카피만 하면서 자체 창작은 도외시하고 연주력에만 목 매달던 일부 음악인들에게 산울림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직접적으로는 3집까지는 한국식 개러지 록의 탄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의 초기작은 "대한민국 헤비메탈의 시작" 이라고도 평가된다.[8] 어떤 음악에도 영향받지 않았으나 한국 거의 모든 록커들에게 영향을 줬다. 지저분한 퍼즈톤 위에 깔리는 김창완의 나레이션에 가까운 나지막한 노래와 관조적인 가사는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상당히 충격이었다고 한다. 실험적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뛰어넘어서 사랑받는 강한 음악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중기와 후기를 거쳐가면서 산울림은 포크락과 디스코 등 딱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였고 계속적으로 많은 한국 록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때의 발라드 노래들은 초기의 록적인 감성을 후퇴했지만 대중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이유가 훗날 리메이크했던 <너의 의미>가 바로 이 시기의 곡이다.

그러면서도 정규 앨범 사이사이에 <개구쟁이>나 <산할아버지>, <외계인 ET>와 같은 동요 앨범을 내기도 한다. 산울림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노래와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동시에 작곡할 수 있는 다양한 감성을 소화할 수 있는 밴드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월 29일 드럼을 담당하고 있는 막내 김창익이 캐나다 직장에서 눈길에 지게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지게차에 깔려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9] 이로 인해 김창완은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이렇게 떠나 버린 이상 예정되어 있던 것 이상의 산울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로써 산울림은 해체하고 긴 전설의 막을 내린다.

아직까지도 공식 팬클럽이 건재하게 살아 있다. 이름은 산울림매니아, 약칭 산매,

2000년부터 라이브카페 등을 대절해서 산울림매니아 XX번째 이야기, 즉 정모를 여는데, 다른 팬카페 모임과는 다르게 김창완과 김창훈이 실제로 얼굴을 비추고, 그리고 생전에는 김창익이 실제로 얼굴을 비추기도 했고 술도 같이 마시기도 했다. 팬과의 소통이 굉장히 잘 이루어지는 그룹 중 하나. 김창완은 창완아저씨, 창완님 등의 호칭으로 불리고[38] 있고, 김창훈은 창훈님, 고 김창익은 창익님으로 부른다. 당연하겠지만, 운영진 뿐만 아니라 회원도 산울림 멤버와 좋은 인연을 잇는 경우가 많다. 다들 좋은 마음으로 팬카페에서 활동하기 때문.

특히 김창훈과 김창익이 미주지역에 거주했을 때는 주변에 사는 산즐 회원들과 함께 자주 식사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 다른 팬카페보다 훨씬 가수 본인의 참여율이 높다. 다만 김창익은 생전에 카페에 글을 쓴 적이 없었고, 김창완 역시 카페에 글을 쓴 적 없이 운영진과의 연락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인데 딱 하나 썼다. 가입인사글. 유일하게 김창훈만이 카페에 3~4개월에 한 번씩 글을 남긴다.

2008년에 김창완씨가 먼저 산울림의 해체선언을 해서 카페 분위기가 잠시 미묘해진 적도 있지만, 지금은 김창완밴드+김창훈+산울림 등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팬카페가 되었다. 매년 2월에 홍대 일대에서 정기 모임을 하니까, 참고 바람. 카페 운영진도 운영진을 가끔 선발도 하고, 못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내려오기도 하는 등 큰 욕심 없이 운영을 하고 있다. 특히 매니저는 2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교체되고 있기도 하는데, 자주 번개를 열고 하는 등으로 운영진끼리 서로 연락처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인 듯. 아,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회원 대다수다. 역사가 오래되고, 탈덕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카페 개설때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분들이 꽤 많다.

다른 팬카페에 비해 유독 도드라져보이는 점은 '산울림 어머님'의 존재. 산울림 삼형제의 어머니가 산울림 매니아 정모때도 참여하시고, 특히 김창완의 공연은 빠지지 않고 방문한다. 10만명이 모이는 락페는 물론 비오는 날 야외에서 열린 콘서트에도 방문하셨다. 80대의 나이인데, 2019년 현재에도 정정해서 김창훈의 신보 뮤비에 출연했을 정도.

https://youtu.be/057Ad3sRuQ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