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三界無安 猶如火宅 衆苦充滿 甚可怖畏
삼계에는 편안함이 없고,불타는 집과 같나니, 중생들의 고통이 가득하여 심히 무섭고 두렵도다.
2 . 火宅, 고난을 벗어나는 원리(사람, 사물에 붙은 마음을 땜)
전지전능 → 無明 → 애욕 → 탐.진.치 → 재앙
(㉮ 무심법 → 금강경 실천 ㉯ 집중법 → 자기개발서 → 안정 → 환희심 → 전지전 능
3 . 火宅 고난을 벗어나는 수행 → 육바라밀, 명상, 참선
4 . 육바라밀을 행해도 고난을 잘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약락소법자, ㉯ 개성이 강한자)
5 . 속히 고난을 벗어나려면 ㉮ 주경야선, 가행정진 ㉯ 절대 공경심 ㉰ 세세생생 선지식 모시길 발원
연일 주경야선 가행정진 하시느라고 대단히 수고가 많으십니다.
잠이 착각이고 본래 없다는 것을 선지식의 말씀을 잘 받드셔 서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지으시기를 발원 드립니다.
오늘은 제가 늘 강조 하는 것입니다만 제가 새삼스럽게 선지식의 소중함,
선지식이 없는 공부는 헛공부다 하는 말씀을 근래에 와서 많이 느끼면서 오늘 말씀드릴 제목을
‘선지식은 구세주다. 세세생생 선지식 모시고 부처님 시봉 잘하기를 발원.’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잠시 보충해야 될 말씀이 있습니다. 이 앞에 선지식은 사람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사람이 아니에요 형상이 없고 보이지 않는 즉 하느님,
유교에서 말하는 하늘과 같은 그런 존재를 부처님이라고 해야 됩니다.
우리는 부처님 하면 32상 80종호가 있는 거룩한 부처님을 연상을 하는데
우리가 금강경에서 공부한 부처님은 32상 80종호를 가진 그런 거룩한 형상을 가진 부처님이 아닙니다.
여기다 뭐를 보충해야 되느냐 하면 부처님은 안 계세요. 전지전능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부처님은 안 계십니다.
그런데 선지식은 분명히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이는 우리를 구원해 주고, 그리고 가피를 내려주고, 선호념 선부촉을 해 주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알아두셔야 할 것은 선지식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때로는 백선생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부모님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스승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귀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가 굉장히 어려울 때 나를 돕는 貴人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즉 부처님은 안 계시다. 구세주의 부처님은 안 계시다.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선지식은 존재 한다. 선지식은 백선생님 같은 깨친 이, 한 사람에 국한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 즉 선지식의 호념, 부촉을 해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도인만이 압니다.
그것이 부모의 모습으로 될 수가 있고, 부모님의 정성어린 기도 로 자녀가 극적으로 변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또 스승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또 기타 경우에 따라서는 악 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의 단점을 일깨워주는 그러한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한테 참 도움이 되는 그런 존 재 이것이 총칭해서 우리가 선지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세세생생 선지식 모시고 부처님 시봉 잘하기를 발원 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왜 이런 제목을 등장 시켰느냐 하면
우리가 절체절 명의 위기에서 한 치의 앞길도 보이지 않으면서 막막하고 난관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
특히 어렸을 때는 철모르고 잘 지내다 가 가정을 거느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의 책임자가 되고 단체의 책임자가 될 때는 근심걱정은 더욱더 많아지고 책임을 느 꼈을 때, 난제가 생겼을 때, 도저히 돌파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없을 때, 그 돌파해 나가는 하나의 방법으로 말하자면 구세주가 되던 어떤 형태이든 어떤 형태인줄 모릅니다. 정형이 없습니다.
그러한 선지식을 모시고 부처님 시봉 잘 하기를 발원을 간절히 하면 그 간절히 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난제들이 순식간에 해결될 수 있다고 저는 보기 때문에 이게 생 활에 매우 필요합니다.
도통하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라 난제를 해결하는데 비롯한 빈곤의 문제, 병의 문제, 난제를 해결하는 데 여러 가지 난제 해결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하고 速한 방법 중의 하나가 세세생생 선지식 모시고 부처님 시봉 잘하기를 발원이 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법화경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먼저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법화경 서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三界無安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 합니다. 이 우주의 중생세계들은 크게 나눠서 삼계라고 합니다.
이 삼계는 도대체 편 안 할 리가 없다. 항상 生老病死가 있고, 사고(生老病死)팔고(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五蘊盛苦)가 있고 그렇다고 그래요 猶如火宅 불타는 집과 같다. 법화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저는 안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세상에는 樂도 있고, 행복도 있고 부분적이지만 극락세계도 있고 그게 어떻게 불타는 집 이냐?
저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었어요. 그런데 점점 세상을 오래 살아보니까
그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느꼈던 순간, 행복이 라는 것은 다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 뒤에는 항상 재앙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저는 서양 속담에 어렸을 때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樂園(낙원) 이라는 것은 항상 검(劒)의 그늘 속에 있다.
우리는 희희낙락 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 순식간에 재앙이 닥쳐오는 것을 저는 너무나도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태평해 도 항상 재앙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러한 인생을 火宅이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衆苦充 滿 각종 고통이 가득차서 甚可怖畏합니다.
두렵고, 두렵고 매우 두려움을 얘기한다. 이게 인제 석가여래가 인생을 표현한 간단 한 사구게다.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런 사구게만 들으면 비관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영원한 행복, 영원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말씀만 하시는 게 아닙니다.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영원한 극락세계 가 반드시 존재한다.
이런 희망의 말씀을 또 동시에 하셨어요. 법화경에도 그런 표현이 나오는데
火宅 고난을 벗어나는 그 원리 이것을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금강경 같은 데서는 한마디로 아상을 없애라.
아상, 인상, 중생 상, 수자상을 없애라는 얘기인데 아상은 탐.진.치로 이어지고, 즉 쉽게 얘기하면 우리는 사람과 사물에 마음을 수시로 붙여놓습 니다.
붙여놓지 않은 그런 사람 없어요.
즉 고통이나 화택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람이나 사물에 붙여놓는 마음을 때기만 하면 모든 고난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세요.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나 사물에 붙여 놓은 내 마음이 착각이고 본래 없음을 알 때 극락세계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한다.
영 원한 행복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있고,
그 붙은 마음을 때는 것이 바로 금강경 실천에 있다. ‘무 슨 생각이든지 바쳐라.’ 하는 게 있다.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간단하게 도표로 작성을 해 봤습니다.
우리는 본래 까마득한 오랜 세월 전에는 부처님과 같은 완벽한 존재였습니 다.
전지전능한 존재에 있었다고 그럽니다. 기독교에서는 우리의 오랜 세월 전에는 하나님 곁에 있었다가
바로 선악과를 따먹 고 애욕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탕자의 삶을 얻게 되었다고 성경에서는 얘기하는데 불교랑 똑 같아요.
무시겁으로 아주 오랜 세월 전에는 우리는 부처님과 같은 완벽한 존재, 전지전능한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무명(불교학자들은 자기가 부처인 줄 모르는 생각 이것이 무명이다.)
에서 자기가 부처인 줄, 자기가 전지전능한 줄 모르고 스스로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고,
자포자기를 하면서 애욕이 생긴답니다.
12인연(무명→ 행 →식 →명색 → 육입 → 촉 →수 →애 →취 →유 →생 →로 →노.사)이 무명에서 비롯된 거예요.
해까닥 한 거죠? 애욕이 생기고 애욕이 아상이죠? 탐.진.치가 생기면서 재앙이 발생했다고 봅니다.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영원한 방법이 있고, 일시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아마 기독교, 천주교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방법이고,
세상에서도 명상, 수련, 염불, 독경, 이런 것도 일시적인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시적인 방 법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걸 잘 안 믿어요.
그런데 일시적으로 행복이 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내리막길로 갑니다.
내리막길로 가는 것도 또 자기한테 원인이 있어요.
그것이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바로 내리막길로 갑니다.
재앙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무심법이 영원한 행복을 얻는 건데
그 재앙이 착각이고 본래 없는 것으로 알고 수도해서 없애는 방법
그러면 본래 전지전능한 능력이 회복이 되면서 영원한 극락세계를 창조합니다.
그런데 집중법이라는 게 있어요.
소위 기도니, 3000배니, 특히 자꾸 집중해서 마음속에 간절히 그리는 거,
마음속에 행복을 그 려서 행복을 찾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는 것은 본래 없다. 라고 하는 방법보다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집중 법이라고 얘기를 했고,
소위 불교를 제외하고 불교중에서도 금강경실천을 제외한 다른 가르침에서는 이런 집중법 밖에는 없다 는 것입니다.
명상도 부처님과 함께하는 명상, 참선도 부처님과 함께하는 참선이라야 한다.
대개는 집중하는 참선, 명상을 하는데 집중을 하는 것은 거의 일시적인 극락세계밖에는 체험을 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행복이 목표죠? 그 것은 무여열반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일시적인 행복을 창조하는 것을 유여열반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최고의 가치, 최상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집중법은 자기개발서 하고, 무심법은 금강경을 통해서 완전한 행복,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다.
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는데 대개 어떤 방법이든지 일단 근심 걱정 이 사라져요.
그리고 안정을 얻고, 그리고 말하자면 환희심으로 이어지는 수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환희심은 가지면 안 됩니 다.
그럼 또 내리막길로 가요. 그때도 또 바쳐야 됩니다.
그런데 환희심이 이어지면 완전한 방법이 되려면 본래 부처가 되는 전 지전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게 원리입니다.
재앙이 생기는 원인, 우리가 왜 탕자가 생겼느냐? 탕자의 원인, 탕자에서 벗어나서 다시 본래의 면목으로 찾아가는 그 과정 이 것을 제가 설명을 했는데 그럼 과정 원리만 설명을 했지 실지로 어떻게 수행을 하는냐 하면
바로 이 탐.진.치를 없애고, 애욕을 없애는 방법이 바로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화택 고난을 벗어나는 수행이 육바라밀이고, 명상이고, 참선이고 해서 탐.진.치를 소 멸하는 방법으로 얘기를 합니다.
탐.진.치를 깨쳐 없어지면 번뇌망상이 소멸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고, 환희심이 나고,
나중에 깨달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환희심은 탐.진.치가 소멸된 증거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 원리는 제가 오랫동안 도인을 모시고 있으면서 이것을 실천해 본 결과 부분적으로 체험한 것, 깨쳐진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설명한 분은 아마 없는데 이 과정은 기억을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제가 칠판에 쓴 겁니다.
그런데 이 육바라밀이니, 명상이니 참선 이런 것들은 대개는 아무리 수승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잘 된다는 아상을 깔고 수행을 해요.
아상을 깔고 수행을 하기 때문에 뭣 때문에 참선을 하느냐?
마음을 안정을 얻기 위해서 안정 그 안에는 이기심이 포함되 어 있습니다.
왜 명상을 하느냐? 왜 염불을 하느냐? 나 잘 되기 위해서가 그 안에 꼭 포함을 합니다.
도통을 왜 하려고 하느냐? 나 잘되기 위해서, 영원성을 얻기 위해서, ‘나’가 포함되어 있는 한 무여열반에 이르지 못합니다.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 다. 그런데 그걸 몰라요.
반드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나’가 전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시봉하는 명상, 부처님 시봉하는 육바라밀, 부처님 기 쁘게 해 드리는 도통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다 거기서 나아가지를 못해요.
도통하는 것 자체가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수가 있어요.
그런데 도통하려고 하는 사람, 즉 잠을 모든 본능에서 벗어나고, 극기를 철저히 하고,
난행고행을 하는 그 자체가 사람들은 알지 못하 게 부처님 시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 속에는 뿌리 깊은 업장이 도사리고 있습 니다.
즉 ‘나’ 잘 되기 위한 도통을 하고, ‘나’ 잘되기 위한 수행을 하고, ‘나’ 잘되기 위한 금욕을 한다.
그런데 밝은이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즉 나를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절대 공경 심이 필요하다.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도통이 필요하다. 이렇게 강조를 하십니다.
백선생님께서는 실지로 그렇게 얘기를 하십니다.
참선하시고 그리고 염불하시고 그리고 하도 철저히 하세요. 정말 수도자와 같아요.
모든 음식에 대한 착을 다 끊은 것 같아요. 모든 애욕에 대한 착을 다 끊어서,
그리고 모든 공포에서 모든 흔들리는 마 음에서 다 벗어나서
누가 보기에는 心如障壁(일념도 불생하고 전후제가 홀단하여 진로가 돈연히 식멸하고 혼침과 산란을 단제하여 종일토록 전혀 분별이 없어서 니소목조와 흡사하니, 그러므로 장벽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마음이 아주 장벽과 같이 여여 부동할 것 같은 그런 도인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도인이 법문을 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그런 수가 있습니다. 아! 저이는 정말 깨친 이다.
저이는 생사해탈을 한 이다. 그렇게 보일 정도로 철저하게 수행을 합니다.
‘나’라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이면에는 다 나 잘되기 위 한 수행을 하더라.
그러나 부처님이 동반되지 않은 수행은 그 후생이 별로 아름답지 않더라.
그래서 새로 도입하는 방법이 부 처님 시봉하기 위한 육바라밀,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도통, 이것이 백선생님이 해 주시는 독특한 밝아지는 수행법이다. 그래서 육바라밀을 행해도 고난을 잘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는 인제 부처님이 안 계셔서 그렇다고 보는 겁니다. 즉 若樂小法者 는 해도 안 되고, 해도 안 되고 이래요.
그런데 왜 수행을 해도 안 되고, 3,000배를 해도 안 되고, 여기 3,000배 정말 철저히 하 신 분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분을 대단히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도저히 못 따라 가겠어요. 그전에 저는 성철스님 같은 분을 상당히 존경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저는 그 분을 못 따라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에 한 끼 먹고 그리 고 잠 거의 안 주무시고, 두문불출하고 철조망 치고 사람을 철저히 묵언수행하고 이건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을 대단히 존경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후생에 왜 제대로 사람 몸을 못 받을까? 신통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왜 사람 몸을 못 받을까?
그런데 밝은이가 볼 때 특히 백선생님이 전생을 쭉 보니까 다 그런 철저한 수행은 ‘나’를 잘 되기 위한 수행이었다.
나를 완전히 버려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과 함께 한 대요.
그런데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오르락, 내리락을 많이 한대요 확 깨친 거 같다.
그러다가 떨어져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고 또 올라갑니다. 오뚝이와 같죠?
그런데 오뚝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일시적인 것 밖에 체험을 못하기 때문에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오뚝이 좋은 게 아니에요. 한번 딱 올라가면 영원한 행복을 딱 체험을 해야 되는데 그것은 아상이 완전히 없어져야 돼요.
若樂小法者는 오르락, 내리락 해서 공부가 소원성취했다가 또 낙심하고 또 공부가 기뻤다가 또 낙심하고 이렇게 되는 걸 말합 니다.
이런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금생에 거의 체험을 못합니다.
죄를 살생을 했어도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동안 잘했던 복 을 다 까먹은 겁니다.
열심히 하고 아주 정몽주선생 대쪽 같은 분 아니에요. 이조말엽에 민충정공유고라고 대쪽같은 성품이죠?
그런 사람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아요. 살신성인의 정신 이것은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그런데 살신성인도 선죽교의 죽음, 대쪽 같은 정몽주 같은 이 또 관운장 같은 사람 어때요?
정말 대단한 죽음을 앞에다 두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똑 바로 뜨고 여몽을 쳐다보니 까 그랬다는 얘기가 있어요.
관운장 같은 사람, 선비의 절개가 있다. 대단하게 보여요? 안 보여요?
그런데 밝은이가 보면 그런 대쪽 같은 선비 속에서도 아상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민충정공 같은 이는 죽어서 사람이 된 게 아니라 대나무가 되었다라고 백선생님께서 그러십니다.
즉 대쪽 같은 사람은 행복할 때는 행복했다가 떨어질 때는 이게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영원한 무여열반의 세계에 못 들어 갑니다. 또 개성이 강한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은 ‘나’ 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념을 철저히 합니다. 이념에 강한 사람이죠? 충신 사육신 고려 때 고려를 위해서 목숨이 사라진 사람이 되게 많았어요.
목숨이 사라져도 이씨 조선을 따르지 않았던 그런 개성이 강한 사람은 역시 아상이 있는 사람이 돼서 밝아지기 어렵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 시봉하기 위해서 해라. 이게 우리 도인이 말씀해 주시는 아주 희유한 법문입니다.
바쳐라 속에는 도통도 부처 님 시봉하기 위해서 해라 이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즉 육바라밀을 행하고, 좋은 일을 행하고, 신의를 지키고, 양심적인 사람, 수녀님들, 스님들, 이런 사람들이 왜 도통을 못하느냐 하면 전생에 언제 한번 되게 살생을 했거나 나쁜 짓을 했어요.
그런 분은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또 이렇게 아상이 강 한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은 아주 수도하는데 장애가 된다. 나를 뿌리 체 뽑아라.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힘으로 안 됩니다. 부처님을 공경해라. 그래서 속히 고난을 벗 어나고 영원한 해석을 끊을 경우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그냥 금강경 1독 갖고는 안 됩니다. 1독도 부처님 공경하는 마음으 로 하면 되죠.
그런데 그것은 상당히 선근이 높은 사람이기 전에는 금강경 1독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부지런히 바친다고 그러 면 말이 됩니다.
그런데 금강경 1독만 해도 된다는 것은 나머지 시간에는 놀아도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고,
한시라도 방심하 면 항상 재앙이 우리는 본래 굉장히 허약한 존재에요.
방심하면 여지없이 번뇌 망상이 침투돼 들어가서 안 됩니다.
금강경을 왜 7독을 해야 되느냐 하면 방심할 틈을 계속해서 부처님을 향함으로써
막는데 7독의 뜻이 있고, 그것도 밤에도 막 고, 낮에도 막는 게 주경야선 가행정진이다
철저히 방심하지 않고 부처님 향한다는 표현 그것이 주경야선 가행정진이다. 이렇 게 보면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절대 공경심을 해라. 절대 공경심을 내라.
그런데 우리는 수시로 방심하려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공부해 라 그러면 야! 좀 쉬기도 해야지,
그렇게 고행을 하는 게 어디 공부의 다냐? 부처님도 고행이 나쁘다고 얘기하셨다.
이렇게 하 면서 핑계를 댑니다. 그런데 핑계대고 말대답하는 것은 공부하기 싫은 표현이고, 놀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공부해라. 7독을 해라. 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깜짝 놀라서 아! 내가 게을렀구나. 게으른 것의 채찍이로구나.
이렇게 하고 7독을 하고, 주경야선을 하고, 가행정진을 하는 것이 바로 난관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그럽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이 주경야선 가행정진 꾸준히 하시는 분은 참 대단하신 분이다. 최상승자다.
실지로 제가 그것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대단히 존경할 만한 분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대단히 귀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경야선 가행정진은 대개 선지식의 지도가 있을 때 이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선지식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선지식의 지도 도 받기가 어려운 그런 경우가 있어요.
옛날 할머니들이 정성껏 정한수를 떠놓고 빌기만 했습니다.
그분들은 부처님도 모르고 하느님도 잘 모르고 유교도 모르고,
불 교도 모르고 불교중에서도 금강경은 더더욱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한수를 떠 놓고 귀인이 오시옵소서. 우리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무사 돌아오길 바랍니다.
이렇게 정한수를 떠 놓고 빌어도 아마 그 효과가 있는 거 같아요 그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는 거 같아요.
지성이면 감천이라 꼭 불교의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세세생생 하늘을 높이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선지식을 은근히 공경하는 마음 이 있습니다.
잠재적으로, 그이는 잠재적으로 세세생생 선지식 모시고 부처님 시봉 잘 하기를 발원 하는 그런 형태로 자기도 모르게 기도했을 겁니다.
그것이 정한수 떠놓고 비는 그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난관을 돌파했다는 그런 실례는 너무나 많 습니다.
이게 꼭 필요해요 이래야만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저는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 그리 고 선지식 모시기를 자꾸 발원하면요 실지로 귀인이 나타납니다.
선지식이 나타납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요번에 체험을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참 외람스럽게 작년 12월 말에 수안보에서 21일 자시가행정진을 끝내고 대중들 앞 에서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 해 금강경을 공부했다.
선지식을 모시고 공부해서 깨친 것이 있습니다. 선지식을 만나 기전의 공부는 헛공부다.
선지식의 소중함을 깨닫고 시키는 대로 저는 새벽 볕에 간다.
그래서 묘향산 금선대의 도인이 목탁을 쳐서 자기 도반을 일깨워오듯이 저는 이제 목탁을 칠 그런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를 않고 목탁소리를 듣고 모여든 사람한테 안식처, 쉼터를 제가 마련해 드리겠다.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쉼터를 마련할 돈도 어느 정도 되었고요. 거기에 열의를 가진 도반들도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안식처를 만들 어드리기 위해서 7개월이죠. 작년 12월 말에서부터 지금 8월 달이니까 만 8개월 동안
쉼터를 마련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 런데 그 쉼터는 도인이 지정한 자리라야 되고, 그리고 또 돈을 만들 수 있는 자리라야 됩니다.
돈을 만들 수 없어 갖고서는 쉼 터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의를 가진 그러한 사람들이 또 있어야 됩니다.
저는 그런 열의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런 돈도 만들 수 있고, 그리고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또 돈도 어느 정도 됐고, 사람도 어느 정도 됐고, 돈도 만들 수 있는 방법도 어느 정도 구상이 됐는데 어떻게 한 치의 앞도 볼 수가 없었 습니다.
저는 그때도 알지 못하게 선지식 모시고 부처님 시봉 잘하길 발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기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선지식이 꼭 부처님 같은 백선생님 같은 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 같은 이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귀인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저는 종종 발견합니다.
저이에게는 드디어 귀인이 나타난 겁니다.
그이의 자신 있는 설명을 듣고 나서 확실히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던 거 같습니다.
그 자신감을 듣고 나니까 이게 그렇게 한 치의 앞도 안 보이는 혼면상태인데다가
이제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돈도 만들 수 있고, 그리고 부채에 대한 부담도 상당히 줄여주는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했던 것,
이것은 저는 선지식을 만난 것이라 확신을 하고 역시 기도의 효과는 헛되지 않았다.
결국은 하늘을 감동시켰다. 이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즉 참선도 좋고, 명상도 좋고, 육바라밀 실천도 좋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부처님 시봉하는 참선,
부처님 시봉하는 명상은 더욱 더 좋습니다.
그런데 더 速한 방법은 무엇이냐?
❶ 절대 공경심이고 그리고
❷ 주경야선 가행정진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
❸ 세세생생 선지식 모시고 부처님 시봉 잘 하길 발원
이것을 정성껏 3가지 방법, 이것이 아주 막막한 과제를 당생에 해결하고 아주 좋고 귀한 발원문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세세생생 선지식 모시고 부처님 시봉 잘하기를 발원 이원을 계속 세우시기를 발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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