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샴발라
감사와 공경

얻어걸린 불교

22/11/26 새벽법회 [금강경 4분]

금강 반야 바라밀 2022. 11. 26. 17:13

 

주경야선 가행정진 하시느라 대단히 수고가 많으십니다.

잠이라는 게 본래 허상이고 분별이고 또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잠이 착각이고 본래 없음을 깨치셔서 대 자유, 대 지혜를 얻어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지으시기를 발원 드립니다.

매주 아침에 다른 무엇을 말씀드리는 것보다도 우리 금강경의 정신 즉 부처님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의가 있 을 것 같아서 매주 새벽법회 때 금강경 해석을 다시 시작하도록 정했습니다.

오늘은 금강경 제4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금강경4분에 復次須菩提야 菩薩은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라고 그랬습니다.

應無所住의 住자는 아무데도 머무르지 말고 보시해라.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왜 나왔느냐 하면 금강경 2분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수보리 존자가 질문을 해요.

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마음을 낸 사람은 즉 밝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여기의 住는 수도라는 뜻이 포함, 어떻게 수도해서 깨치겠습니까?(降伏其心)

우리는 수도한 뒤에 깨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랬는데 부처님께서 제3분에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그랬죠?

깨치는 것이 먼저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도를 해서 깨치는 것은 나중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깨치는 것이 먼저다.

너희들이 본래 부처라인 것을 안 뒤에라야 수도를 하는 것이 순서다.

부처인 줄 모르고 열등한 존재로 알고 수도를 해서는 밝아지기가 어렵다. 요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게 굉장히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어요.

까딱 잘못하면 우리는 열등한 존재로 알고 출발해서 밝아지려는 이런 과정을 밟는 것 으로 알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의 본래 정신은 열등한 존재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본래 부처다.

즉 부처님이 처음에 깨달으시자마자. 대각을 이루시자마자.

제一乘(일승) 一切衆生(일채중생)은 다 實有佛性(실유불성)이라는 그 말을 뒷받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요것을 잘 이해하신다면 우리 일상생활이나 일거수일투족에서 상당히 그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을 자신감을 가지고 대할 수가 있게끔 그렇게 되고,

마음도 그렇게 될 뿐만 아니라 언어나 행동에 있어서도 다 그런 식으로 출발 이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열등한 존재에서 금강경정신이 아닌 보통정신 그러니까 즉 아함부,

방등부 이런 데서 출발하는 것은 굉장히 열 등한 존재 이 세상은 굉장히 고통이 많은 것이다. 이런 데서 출발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방식이나 행위 다 제각각 다 르다. 요렇게 아셔야 됩니다.

즉 수보리존자는 수도해서 깨치는 것으로 알았는데 금강경 3분에 깨치는 것이 먼저다.

본래 부처임을 알아라. 그리고 그 뒤에 머물러라.

수도해라는 뜻인데 요 수도는 우리 참선방에 많이 다니는 사람은 보림(保任)이라는 말을 아실 겁니다.

깨달음을 어 떻게 유지하느냐? 이게 住(주=머무르다,살다)입니다.

그래서 백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금강경 3분은 본래 전지전능한 것을 깨치는 가르침이고

금강경 4분에서 10분까지는 住를 가 르치는 것이다. 즉 보림(保任)을 가르치는 것이다. 요렇게 얘기합니다.

즉 금강경10분이 결론이라고 그럽니다.

금강경10분에 應無所主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이 결론이고 그때까지 하면 금강경 한번을 다 한 거 래요.

그런데 11분, 12분은 공덕을 얘기한 거죠?

공덕을 얘기해서 우리 백선생님 표현에 의하면 금강경12분까지가 금강경 한 번을 다 설한 것이다.

요렇게 얘기를 하시고 금강경은 본래 3번을 설한 것이다.

(1분부터 12분까지가 한번 설한 것이고, 13분 부터 16분까지가 2번을 설한 것이고,

17분부터 32분까지가 3번을 설한 것이라고 이전 법문에서 법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핵심은 1분부터 12분까지가 다 들어있다. 요런 뜻이 됩니다.

그럼 4분에 대한 즉 보림(保任)을 어떻게 하느냐? 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책을 보면 復次須菩提야 수보리야 또 얘기를 합니다. 나는 인제 부처인 것을 알았어요.

항복기심을 깨우쳤어요. 나는 본래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깨우쳤어요.

어떻게 머무르느냐 하면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아무데도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 는 것을 행동을 하라.

사회생활을 하라. 요런 뜻으로 해석을 하시면 됩니다. 보시는 베푼다는 뜻인데 좋다는 의미죠?

그런데 여기서는 좋은 행위, 나쁜 행위 일체, 일체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행위를 다 보 시라고 이해하면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應無所住 行於布施 하더라도 머무르지 말고 사회생활을 해라. 요런 뜻이 됩니다.

요것을 다시 설명하시기를 所謂不住色布施며 色에도 머무르지 말고

聲香味觸法에도 머무르지 말고 그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참 중요해요. 色 에도 머무르지 말고 聲香味觸法에도 머무르지 말라.

즉 色聲香味觸法이 여기에 처음으로 등장을 합니다. 우리는 색성향미촉법이 있는 걸로 알아요.

뭐가 보이죠? 경치가 좋다. 산 色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산에서 시냇물소리가 졸졸졸 내려오면 시냇물소리가 실지로 있는 거 같아요.

꽃의 향기가 납니다. 향기가 있는 거 같습니다. 이게 있을까요? 色

聲香味觸法을 보는 것을 眼耳鼻舌身意라고 합니다.

눈이 있으니까 색을 보고, 구 기 있으니까 소리를 듣고,

眼耳鼻舌身意가 있고 眼耳鼻舌身意는 色聲香味觸法을 실지로 보고 있습니다.

眼耳鼻舌身意도 있는 것 존재로 여겨지고 色聲香味觸法도 존재 팩트fact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한 번 그 근원을 따라 올라가면 이 실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결론은 허상이라는 겁니다. 그런 데 왜 허상을 실상으로 느끼게 만드느냐? 팩트로 만드느냐?

이것은 ‘나라는 놈’ 즉 ‘몸뚱이 착’이 허상을 실상으로 보게 만든다 는 겁니다.

우리는 신기루라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사막을 가는 상인이 있는데 상인이 물이 몹시 먹고 싶죠?

그래서 낙타를 타고 오아 시스를 찾아 쭉 가다보니까 아무리 가도 오아시스가 안 나오죠.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오아시스를 자꾸 그리는 겁니다. 언제 오 아시스가 나타날까, 하고 마음에 그리는데

어느 날 오아시스가 나타납니다. 한 사람만 보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봐 요.

한 사람만 보면 환상적인 현상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보면 환상이 아니라 fact로 봅니다.

그래서 오아시스가 나타났다고 아주 탄성을 지릅니다.

오아시스가 다 온 것 같다고 해서 딱 와서 보면 거기 사람도 있고 물도 있고

추억도 있고 실지로 가서 보면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것을 신기루라고 하는데 그 오아시스 즉 신기루는 우리가 목마름 때문에 불러낸 허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신기루만 허상이라는 게 아니라 이 세계라는 것이 다 신 기루와 똑 같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려낸 허상이다. 요렇게 아셔야 됩니다.

즉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는 나라는 생각에서 만들어낸 허상이고,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도 허상이고

이것을 봤다. 라는 대상 역시 허상이라는 거예요. 色聲香味觸法은 아상이 만들어냈고,

‘아상은 나라’는 생각인데 이 몸뚱이를 보호하려는 마음인데 이 아상이 너라는 것, 중생, 수자도 동시에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일단 이해하셔야 됩니다.

아상, 나라는 생각, 이 몸뚱이를 보호하려는 이 마음은 각종 공포나 고난을 느낍니다.

이것은 몸뚱이를 방어하려고 합니다. 화 를 방어하려다가 잘 안 되면 두려움을 느끼고 탐.진.치와 똑 같은 얘기라고 그럽니다.

탐친지로 여러 가지 행위를 한 것을 업이라고 합니다. 살생, 투도 사음을 합니다.

몸뚱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살생을 하기도 하 고 도둑질을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나쁜 짓들을 합니다.

그리고 결과를 받습니다. 결과가 육체적으로도 받고 정신적으로도 받습니다.

행위에 대한 결과를 업보라고 그러는데 업보를 꼭 육체적인 과보로만 얘기하는 걸로 생각하기 쉽지만

정신적인 과 보 즉 불안, 초조, 공포 이런 것들이 다 업보에 속합니다.

업보의 뿌리를 업장이라고 그럽니다.

요것의 용어는 다 우리 백선생님께서 얘기해 주신 거고, 요 용어를 잘 알게 됨으로써 금 강경의 해석이 실감나게 가능하다.

이것을 꼭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업보, 업장이

실지로 없는 세계를 있는 세계처럼 만들고, 없는 미진을 있는 미진처럼 만들고

色聲香味觸法이라는 게 본래 없지만 있는 것처럼 만드는데 다 신기루와 같은 현상이고 실지로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일단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게 해석을 백선생님은 이렇게 하셨어요. 色에 住해서 머무르지 말고 聲香味觸法에 住해서 머무르지 마라.

그런데 이걸 글자로 해석하면 전혀 금강경과 다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色聲香味觸法이 본래 없는 거거든요. 없는데 住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

허상이니까 허상에 속아서 분별내지 마라. 요 런 뜻이 됩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그게 실감이 잘 안 나요. 그래서 백박사님은 업보에 住해서 마음을 내지마라.

요렇게 해석합니다. 色이라 는 업보, 聲香味觸法에 끌리는 업보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자꾸 뭘 궁리하거나 그리워하거나 누굴 미워하거나 요런 생각 을 하기 쉬운데

그리움, 탐.진.치 전생에 어떤 행해야 될 과보를 느낍니다.

과보는 육체적으로도 받을 수가 있고, 정신적으로도 받을 수가 있는데 정신적인 과보를 업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분별을 일으키고 분별은 전생에 했던 행위에 대 한 과보다. 그리고 누가 어쩐지 끌려요. 돈을 주고 싶어요. 그래서 돈을 주는 수가 있습니다.

저는 유명한 홍순원 같은 분 중국북경에 갔을 때 어느 홍등가에 갔더니 어떤 미인도를 그려 놓았어요.

오늘 저녁 나와 하루저녁 자면 10만 냥을 주십시오.

이렇게 그림을 그 려놓았는데 어쩐지 그림을 그려 놓으니까 마음이 쫙 끌립니다.

요것을 백박사님은 업보에 이끌려서 홍등가에 들어갔다. 이렇 게 얘길 합니다.

들어가서 사연을 얘기해 보니까 자기 전 재산을 털어서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것은 업보에 이끌려서 주 는 것입니다.

업보에 이끌려서 주는 것의 반대는 깨우쳐서 즉 자기 충동이나 욕망에 이끌리지 않고

조건 없이 주는 마음을 업보에 이끌리지 않는 不住色布施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해석이 좀 돼요.

그런데 색에 住하지 말고, 聲香味觸法에 住하지마 라. 그러면 상당히 지혜로운 사람은 금방 알아듣겠죠?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잘 못 알아들으니까 어쩐지 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요.

누가 달라고 그랬을 때 아주 주기 싫은 사람이 있어요. 특히 더 주기 싫은 사람이 있어요.

더 접근하면 결사적으로 막 으려고 하고 그렇게 안 주려고 합니다. 이것도 업보에 이끌려서 내는 마음입니다.

선입견이라는 게 있어요. 선입견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선입견에 이끌려서 행동하지 조건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 니다. 조건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도인이다.

모든 것을 허상으로 알아야만 선입견이 없어지고 그래야만 조건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해서 해석을 하면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所謂不住色布施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색에 주하지 말고, 즉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각종 충동 이것에 의해서 행동하지 마라.

일단 어떤 생각이 올라오면 바쳐라. 이 뜻 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가 이렇게 법문을 하려 올라올 때도 그렇고,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어떤 충동에 이끌려서 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도 그래서 아! 어떤 강의를 해야 학생도 잘 듣고 월급도 받을 수 있다.

어떤 계산적인 판단에 의해 서 강의를 하는 수가 많습니다.

제가 여기서 법문을 할 때도 이 법문을 해야 다른 사람들이 듣고 신심발심을 하겠다.

일단 어떤 분별에 의해서 제가 법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선입견이나 분별이나 업보나 충동이나 이런 데 주해서 마음을 내지 마라는 겁니다.

不住色布施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 그겁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뭘 행동을 하되 이렇게 다 선입견 이런데 따라서 행동하지 마라. 그런 뜻입니다.

일단은 올라오는 생각을 바 치면서 올라오는 지혜에 따라서 행동해라. 요 뜻이 됩니다.

일단 바치고 해라. 너는 그럴 정도로 전지전능한 사람이다. 너는 모든 능력을 구족한 사람이다.

잘 바치면 능력이 나온다. 지혜 가 나온다. 그 지혜에 의해서 움직여라. 요런 뜻이 됩니다.

그 지혜에 의해서 움직이면 말하자면 부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내가 혼자 사는 삶이 됩니다.

이 세상은 외롭습니다. 나 혼자 세상을 산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버겁습니다.

그건 자기가 열등하다는데서 출발한 거예요. 그런데 그 생각 이 착각인 줄 알고 자꾸 바칩니다.

바치면 든든한 기운이 실지로 올라오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한번에 안 올라오시면 자꾸 바 쳐보세요. 바쳐보면 든든하고 분명해집니다.

분명해지고 자신감이 생겨지는데 그 자신감이 생겨진 것을 바탕으로 행동하면 100이면 100다 잘 맞습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좋을 때도 있었고, 굉장히 나쁠 때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시종일관 고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좋을 때 지금 생각해보니까 좀 바쳐졌던 거 같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이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바쳐지니까 내 속에서 능력이 나와요.

능력이 나오니까 성적이 좋아지는 겁니다.

그리고 재앙이 생기고 깨질 때는 바치지 않았을 때고 선입견에 머물렀을 때 입니다. 그래서 충동했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여지없이 성적도 나쁘고 재앙도 생기고 자동차 사고도 나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色에 주하지 말고, 성향미촉법에 주하지 마라. 그것은 자기 충동이나 선입견이나

감정이나 이기심이나 요런 데 주해 서 내지마라. 바치고 해라. 뭐든지 아상이 없이 마음을 내라. 그러면 그 복덕은 매우 많다.

는 건데 이걸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그런데 동방허공을 아무리 생가해도 끝이 없거든요.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남서북방사유상하를 다 생각해도 끝이 없거든요.

그러면서 菩薩의 無住相布施福德이 亦 復如是하야 不可思量이니라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무주상보시의 공덕이 크다고 그랬어요.

무주상 보시는 이끌려서 보시는 하는 겁니까?

충동에 이끌려서 어쩐지 사람이 예쁘니까 보시 하고 싶어 하고, 어쩐지 미우니 까 주기가 싫어요.

이게 다 색성향미촉법에 주해서 하는 거고 업보에 이끌려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업보에 이끌려서 주고 싶고, 업보에 이끌려서 주기 싫은데 그때 그 생각을 다 바치면서

오로지 응무소주하야 그 부처님 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유일하게 업보가 없는 곳은 부처님 밖에 없습니다.

어쩐지 끌린다. 그러면 다 업보에 이끌리는 겁니 다.

저 법문을 듣고 처음에 법문을 들을 때부터 법사님 법문에 저는 뿅 갔다. 이런 얘기를 저는 종종 듣습니다.

이것도 전생에 저와 맞은 업보에 이끌려서 오신 겁니다. 그래도 좋은 업보예요.

그런데 아주 나쁜 업보가 있죠? 저는 나쁜 업보에 이끌려서 간 사람 을 봤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는 소리를 얘기를 하는데 기가 막히게 하거든요. 그이 말을 자꾸 끌려가다가

그 뒤에는 교묘한 방법으로 가산을 탕진하게 하고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대신역할을 하고

이혼하게 만들어서 완전히 패가망신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쁜 업보에 이끌려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제 금강경 법문을 듣고 처음 들을 때부터 아주 마음이 후련하게 열리고

눈물이 나오면서 여기까지 오셔서 금강경을 독 송하시는 분들은 물론 그것도 업보에 이끌리는 겁니다.

그런데 아주 그 업보에도 옅은 업보가 있어요. 좋은 업보가 있어요.

그 런 업보에 이끌려서 오되 그러나 업보가 아주 없는 당처, 이것은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應無所主 而生其心이라는 것은 업보 없는 곳을 향해서 마음을 내라는 뜻인데

그것은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마음을 내라. 요런 뜻이 됩니다.

여기 오시는 분은 부처님만은 못하더라도 굉장히 업보가 없는 곳입니다.

업보가 엷은 곳을 향해서 마 음을 내는 곳입니다.

그런데 업보가 진한 곳을 향해서 마음을 내면 패가망신합니다.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라는 것은

업보가 없는 부처님, 업보 없는 곳은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시봉을 위해서 마음을 내는 것인데 요것은 그렇게 마음을 내는 순간 마음속에서 경건한 마음이 나옵니다.

공경심이 나와요. 업보에 이끌려서 마음을 내는 순간은 마음이 그렇게 맑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는 법문을 듣고 마음이 뿅 갔다라고 하면서 마음이 맑아졌다라고 하는 것은

업보가 엷거나 업보가 없는 곳을 향해서 마음을 냈을 때 그렇게 됩니다.

공경심이 나고 佛心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공경심과 불심에 의해서 행동을 할 때는 참 지혜가 나오고 참 능력이 나오고 위력 이 나옵니다.

제가 이런 논문을 참 재주가 부족했던 사람이고 그랬는데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괜찮은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내 선입견을 부처님께 바치고 모른다. 못한다는 생각을 자꾸 바치니까 순간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어떤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아이디어는 應無所住해서 行於布施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와 능력이 생기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一切世間 天人阿修羅 皆應供養 하기 때문에 그 위력이 굉장히 크다.

제가 어제 얘기했지만 참 고맙게 생각하는 예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리 법문을 들으면 국내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분들이 아주 거액을 보시를 해요.

한 번도 법당에 오시지 않은 분들이 법문만 듣고 거액을 보시하는 것을 보고 무주상보시의 위력이 크다. 이런 걸 느낍니다.

또 해외에 있으면서도 굉장히 좋아하시고 적잖은 성금을 가지고 오시는 분도 또 볼 수가 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참 감동한 것은 이교도입니다.

기독교에 독실한 성직을 가진 사람들 또 카톨릭에서 실지로 성직을 가진 사람들이

저의 무주상 행위에 대 해서 감동을 하더라고요. 실지고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무주상보시는 이념의 벽을 넘습니다.

종교의 벽도 뚫어 넘어요. 그래서 一切世間 天人阿修羅한테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그 복덕은 매우 크다. 그거 말고도 복덕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요 다음시간에 금강경 4분 다시 한 번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은 요 정도로 일단 하시고 요런 금강경 정신을 가지고 독송을 하 시고

7독을 하셔서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지으시기를 발원 드립니다.

제도 하시는 영산교주 석가모니불 시봉을 잘 하겠습니다.

제도하시는 용화교주 미륵존여래불 공경을

모든 분들이 세세생생 선지식 모시고 부처님 시봉 밝은 날과 같이 복 많이 짓기를 발원 드립니다.

미륵존여래불

미륵존여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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