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샴발라
감사와 공경

금강경 [해석]

금강경 21분 해석 [김원수법사님 새벽법문] 출처 :바른법연구원

금강 반야 바라밀 2023. 9. 29. 18:32

주경야선 가행정진 공부하시느라고 대단히 수고들 많으십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업장, 잠이 착각인

줄 깨우치셔서 모든 업보에서 자유로워지셔서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지으시기를 발원 드립니다.

오늘은 금강경 21분 해설에 대한 말씀인데 정확히 말씀드리면 건강한 사회인이 되는 그런 21분의 해설을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건강한 사회인이 되는 금강경 21분과 그냥 금강경 21분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틀리느냐? 이것을 우리가 알고 들어야

될 것 같습니다.

❶ 우리가 건강한 사회인이 되는 금강경 해설 앞에 붙여야 될 수식어가 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건강한 사회인,

즉 어떤 것이 건강한 사회인인지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능력이 없거나 지혜가 없으면 사실은 건강한 사회인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밖에 나가서 밥벌이도 제대로 못한다. 가장

노릇을 할 수가 없습니다. 먹여 살리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가장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먹여다주는데 돈 벌어다 줘요. 그

런데 가정을 화목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일방 통행식 그런 가장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니까 가장의 역할은 돈을 벌어다

주는 것 이외에 가정을 잘 통솔하고 리더십을 갖춰야 된다. 이것이 가장으로서의 필수요건입니다.

남자가 되고 결혼한다고 다 가장이 아니에요. 가장 같지 않은 가장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고, 가장 같지 않은 가장이 너무나 많

을 때 가정불화와 파괴로 이어지고 나라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했는데 修

身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업장을 닦아야 되고, 즉 건강한 사회인이 되는 그런 요건을 갖춰야 되고, 그리고 건강한 사회인

이 된다는 것은 가정을 잘 이끌어나가야 된다. 달리말해서 돈을 벌어다 주려면 어떠해야 돼요? 능력이 있어야죠. 능력은 다른

말로 지혜라고도 얘기합니다. 또 가정을 화목하게 해야 돼요. 가장이라고 해서 돈만 벌어줬다고 해서 일방 통행식, 명령식으로

이렇게 해서 가정이 통솔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능력과 人格, 인격은 착하기만 하면 인격이 아닙니다. 통솔력이 진짜 인격이

다. 이렇게 됩니다. ‘능력(지혜)과 인격을 갖춘 건강한 사회인이 되는 금강경해설’ 이렇게 해야 말이 된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냥 건강한 해설하면 추상적이죠? 진짜 건강한 사회인은 어떤 자격요건을 갖춰야 된다. 지혜가 있어야 된다. 능력이 있어야

된다. 달리 말해서 돈 벌어다주고 가정을 꾸려나갈 능력이 있어야 건강한 사회인으로서 첫째 요건입니다. 그 뒤에 가정을 화목

하게 하려면 인격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인격을 반드시 갖추어야 된다. 2가지를 갖추는 것이 건강한 사회인이 되는 요건이고

요 그 요건을 갖추는데 금강경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금강경 공부는 깨치고 도통하고 무량공덕을 얻는 데나 필요한 거지 건강한 사회인이 되는 거는 무관하다고 생

각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직접적인 관련이 많고요. 또 실제로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데 금강경이 이렇게 도움이

된다고 해야 불교공부 많이 하지 않겠어요? 도통한다고, 소원성취 한다고 해서 불교공부 한다는 그런 불교공부는 반쪽짜리 불

교공부입니다. 우리가 이걸 잘 알아야 됩니다.

죄송합니다만 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런 것 가르쳐주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달리말

해서 능력과 인격을 갖춘 즉 건강한 사회인이 되는 금강경 해설이 금강경과 관계된다는 이유는 즉 마음을 닦음으로써 지혜와

인격이 생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을 닦으면 즉 탐.진.치를 없애면 마음이 평화롭다는 것까지는 압니다. 행복해진다는 것까지는 압니다. 그

런데 지혜와 인격이 생긴다는 것은 도대체 알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더더욱 모르는 것 같아요. 금강

경 공부가 국가사회에 기여한다는 아주 우리가 모르는 그런 큰 역할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우리는 그걸 알고 금강경 공부를

하라. 이 뜻입니다.

그럼 금강경해석을 일단 한번 해 보고 금강경 해석 중에 어떤 것이 지혜와 인격을 키우는 그런 부분인가 이것을 우리가 알아

야 됩니다.

금강경 21분에 어떤 표현이 나오느냐 하면

須菩提야 汝勿謂하라 如來 作是念하되 我當有所說法하라 -

수보리야, 너는 그런 사고방식을 갖지 마라. 그런 판단을 하지 마 라. 요런 뜻입니다.

부처님이 내가 49년 동안 많은 설법을 하는 것을 그대들은 보았을 것이다. 수보리 뿐만 아니라 거기 모인

1250대중들한테 하는 얘기입니다. 나는 아함부법문을 12년 동안 얘기했고, 방등부 법문을 8년을 얘기했다.

또 반야부법문을 21 년동안 얘기했다. 부처님은 참 포교를 위해서 말씀을 많이 하시는구나. 이야기할 거리도 많이 있겠구나. 내가 얘기를 많이 한 걸로 봐서 저이는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하 지 말라. 이런 뜻입니다. 기존의 관념하고 많이 틀립니다.

莫作是念하라 - 그런 생각하지 마라.

何以故오 -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49년 동안 수많은 설법을 하시는 것을 듣고 아! 부처님은 참 하실 말씀이 많

으시네. 아는 것도 많으시고, 능력도 많으신 것은 빤하지만 하실 말씀도 너무 많으시네. 또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또 포교

를 위해서는 말이 반드시 필요하구나. 이런 생각도 할 것이다. 그래요? 안 그래요?

우리가 포교할 때 침묵과 묵언 과묵해서 포교가 잘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그런 사람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또 부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말씀의 필요, 요것을 우리는 다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 얘기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 하지마라. 내가 할 얘기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다. 이건 우리 기존의 사고방

식을 깨뜨리는 거예요.

제가 여기 와서 매주 토요일이면 와서 법문을 합니다. 그러면 그러실 거예요. 저분은 할 얘기도 되게 많네, 나는 듣기도 싫은데

왜 이렇게 졸리는데 이걸 왜 졸지도 말라고 그러면서 역설을 하나 저이는 뭘 주장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물론 좋게 생

각하시는 분은 그런 생각을 안 하시죠. 저이는 참 자비심도 많다. 우리를 일깨워주려고 저렇게 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

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개중에는 안 그래요. 물론 자비심도 있고 그렇겠지만 알고 보면 자기세력 키우려고 그러고 자기 인기

끌려고 그러고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부처님도 그랬을 거고, 너도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할 겁니다. 그런데 적어도 저는 뭐 그런지도 모릅니다.

인기를 끌기 위해서, 세력을 끌기 위해서 그런 요소가 아마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틀려요. 부처님은 말씀은 많

이 하셨지만 인기를 끌기 위해서,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또 얘기를 해주고자하는 간절한 염

원이 있어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若人이 言如來 有所說法이라하면 그렇게 얘기했다면 卽爲謗佛이며 不能解我所說故니라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내 참 뜻

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걸 굉장히 잘 알아야 됩니다. 즉 달리말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할 거리가

있어서 포교하고자 그네들을 밝게 해주는 어떤 염원이 있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요런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난 할 말이 없다. 또 사실 하고 싶은 의욕도 없다. 요런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조금 아리송해지죠? 저도 그렇게

똑 같이 생각을 했어요.

우리 백선생님께서는 참 말씀을 많이 하셨던 분입니다. 한번 법문 들어가면 물론 말씀을 안 하실 때는 안 하시지만 한번 들어

가면 한 시간도 좋고, 2시간도 좋고 마냥 얘기를 해요. 그것도 젊은 청년남녀들하고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보살들, 할머니들 이

런 사람들 닥치지 않고 얘기를 하는데 중간에 깔깔깔해 대면서 다 나오면 저 백선생님이 엄숙한 법문을 하시는 건가, 잡담을

하시는 건가.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리고 아무 욕심이 없다고 그러시지만 저렇게 보살들, 이런 사람들을 제 끌어서 자기 세력을 키우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사실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마라. 보통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부처님도 그러지 않고 백선생님도 그

러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믿게끔 됐습니다. 공부를 해야 믿게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내 참뜻을 모르는 것이다.

須菩提야 說法者는 無法可說이 是名說法이니라 - 사실 부처님은 할 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 속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

면 의혹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모든 것을 다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말로서 설득시킬 대

상들이 아닌 것이다. 그네들은 말에 의해서 사고방식이 바뀔 그런 정도로 구족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

다.

제가 금강경에 말씀드린 4대진리 일체유심조, 공, 불이, 구족의 진리를 말씀하셨지만 그대들은 부처가 돼서 누구한테 설법을

들을 필요가 있을 정도로 구족한 존재도 아니고 그리고 외로운 존재도 아니고 여기서 좋은 설법을 듣고 희망을 얻고 용기를

얻을 정도로 그런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것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할 말이 없다는 것은 거기에 상당히 다양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알아라. 이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할 말

이 없는 것이다. 이 할 말이 없다는 것은 無所說이라는 표현이 13분에도 나오지만 달리 말해서 그대들은 너무나 완벽하고 더

이상 법문을 들을 필요가 없는 위대한 존재다. 단지 스스로 그렇게 위대한 존재라고 깨닫지 못하고 열등한 존재로 깨달으면서

다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나한테 물어보니까 내가

대답으로 그 방법을 일러주는 게 아니라 네가 할 수 있다. 네가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르느냐고 힌트만 줄 뿐이다. 실지로 얘기할

거리는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다양하죠.

이런 얘기를 하나 검토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말이 많은 사람을 불자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논어에도 교언영색巧言令色,

선의인鮮矣仁 즉 말 화려하게 잘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요새 말 잘 하는 사람 MC 그런 사람들은 불자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

어요. 인격이 없는 사람이다. 말로 사람을 꼬드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군자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男兒一言 重千金이다. 남자가 얘기하는 것이 천금의 가치가 있으니 나불나불대지 마라. 철새처럼 촐닥촐닥대지 마

라는 말이 있죠. 우리는 중학교 1학년 때 그때만 해도 벌써 몇 십 년 전 얘기입니다만 남자가, 우리 국어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잘 썼어요. 그런데 요새는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이 없어요. 남녀평등이 되고 말았어요. 남자가 말이 없다가는 먹고 살 수가 없어

요 영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말 잘하고 이런 것들을 군자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고 오히려 과묵한요.

영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말 잘하고 이런 것들을 군자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고 오히려 과묵한

사람 이런 사람을 군자의 반열에 올렸는데 지금 시대는 좀 달라졌죠?

❷ 그래서 잘 보세요. 이 부자사이에 말이 없었어요. 우리시대(법사님)만 하더라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대화가 부재했습니다.

엄마하고는 좀 하죠. 즉 그게 대화가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대화를 해서 알아들을 정도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좋은

말씀은 성인이 다 해놨으니까 성인의 뜻만 따르기만 하면 되지 대화하고 설득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아버지의 말을 절대로

복종하고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럼 너의 인격도 키워지고 능력도 키워지지 내가 따로 설득을 하고 잔소리 하고 이럴 필요가

없다고 본 게 우리나라 전통 도덕관념이었습니다.

부자간에도, 부부간에도 대화가 없었습니다. 일방통행이라고 하면 되지만 우리는 부부간에 부자간에 대화보다도 그 지침을 주

는 성인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서삼경을 따르기만 하면 부자간에 대화할 필요가 없어요. 부부간에도 대화할 필요가 없어요.

사제 간에도 대화나 설득이 필요 없어요. 명강의라고 있습니다. 강의를 잘 해서 학생들로 하여금 스승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명강의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명강의 필요 없어요. 지식이 그렇게 중요하

지 않았습니다. 많이 아는 게 중요하지 않다. 옛날 어른은 그랬습니다. 사람이 되어라. 인격을 갖춰라. 지혜를 갖춰라. 이걸 중

요시 여겼습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은 선의인鮮矣仁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지혜와 능력을 밝히는 데는 말이 필요 없어요. 행동이 필요

했습니다.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말 잘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민주주의 사회가 됐어요. 부자간에 평등이 됐어요. 그전에는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부부중에서 여필종

부女必從夫 삼종지도라고 그래서 여자는 남편이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지주가 있고 농민이 있습니다. 지주는 절대적인 존재

였습니다. 예전에도 사헌부 사간원이라는 게 있어서 야당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임금의 말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부, 부자, 사제, 사노, 여야라는 게 거의 일방통행 식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런 식이었다가는 난

리가 납니다. 요새는 심한 경우에는 아버지가 야단을 치면 미국 같은 데서는 경찰에 고발하는 풍토까지도 생겼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식도 부처님같이 존귀한 존재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되지만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옛날 것이 상

당히 나쁜 점이 많았었어요.

아버지의 일방통행식 이런 이것이 우리나라 발전을 저해한다고 그래서 1910년대인가 1920년대에 춘원이광수선생이 ‘자녀중

심론’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저도 그것을 한 두어 번 읽어봤습니다. 읽어봤더니 유생들이 난리를 쳤어요. 이런 상놈, 천하의 이

광수 상놈, 그래갖고서는 쳐들어갔습니다. 이광수선생은 도피를 했어요. 요새는 그 얘기가 통해요. 몇 십 년을 내다보고 쓴 겁

니다.

요새 민주주의 사고방식을 해서 과학기술은 발달하고 이랬는데 옛날 운운하던 것을 보면 점점 더 상놈화 되어 가고 있어요. 이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상놈화 되어 가는 것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나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나온 피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좋죠.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좋죠. 그런데 상놈이 되는 것은 막아야 됩니다. 누가 막아야 됩니

까? 학교에서 막을 수 없습니다. 학교 선생님 막을 수 없습니다. 교수가 막을 수 없습니다. 대석학이라고 해도 말 듣지 않습니

다. 그것은 종교에서 할 일이다. 특히 불교에서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실 대화가 거의 없었는데 소위 민주주의라는 게 생기면서 대화 좀 합시다. 우리가 시사평론 같은 것을 보면 여야가

항상 평행선만 달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부부끼리 이렇게 다툼을 할 때도 대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행선을 달리는 것을

봅니다. 사.노, 노사분규라는 게 있지만 노하고 사하고 대화할 때 대화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행선만 달리고 결

론은 없이 끝나는 수가 있고 결론은 힘센 자가 이기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자! 여기에 우리 대화 좀 합시다. 여기에 기치를 든 사람이 있어요.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한때 기독교에서 선두주자역할을

한 강원형목사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강원형목사가 자기가 그래요. 대화라는 말을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자기다. 그 얘기를

합니다. 대화라는 것은 상대를 존중할 줄 알아야 됩니다. 들을 줄 알아야 된다. “대화 좀 합시다.” 이런 식의 주장을 했는데 이게

결국은 지금도 잘 안 통하는 것 같아요. 지금 시사평론 한번 들어보세요. 특히 여야가 토론하는 것을 보세요. 평행선만 달리다

가 결론 없이 끝냅니다. 이것을 많이 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집에서 보세요. 부부가 대화를 하죠. 옛날에는 대화가 없었습니

다. 일방통행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게 되면 결론 없이 끝냅니다.

옛날에는 아들이 아버지한테 꼼짝 못했어요. 그런데 이제 대화를 하는데 대화를 해도 결국 결론이 없어요. 결국 아버지가 돈

있고 권력 있으면 아버지 말에 복종하게 돼있고 외레 아들이 크면 아버지가 아들한테 꿈쩍 못하고 절절 깁니다.

요새는 어떤 세상이냐 하면 아들이여! 나를 제발 요양원으로 보내주지 마라. 이런 시대가 됐어요. 돈 있고, 권력 있으면 아들이

말에 복종을 하게 돼 있습니다. 현대판 고려장이 바로 요양원입니다. 요양원가자고 그러면 바로 주장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 대화가 좀 부재하다고 봅니다. 여야가 정쟁을 하는 것을 보면 대화라고 강원형목사가 했고, 미국에서는 되는데 왜 한

국에서는 안 되느냐? 이렇게 하지만 한국에서는 실지로 대화가 안 되고 있다는 겁니다. 여야, 사노, 부자, 부부간에도 안 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왜냐 이기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❸ 그런데 대화를 안 할 수밖에 없어요. 왜 안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영업할 때 말없이 영업할 수 있습니까? 말 잘해야죠. 언어의 기술, 영업의 기술, 효과적으로 말을 잘하는 기술을 배웁니다. 또

국가 간에 외교가 있습니다. 말없이 외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책에서 배웠습니다. 서희라는 고려시대외교관이 간

단한 말로 거란의 침입을 막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외교하는데 반드시 탁월한 대화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그 다음 포교할 때 대화가 없어서 됩니까? 말 잘해야죠. 불교 쪽에서는 포교 왕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만 기독교에

서는 선교 왕이라는 그런 타이틀을 가지고 상금을 주는 것을 봤어요. 수십만 사람을 포교했다고 해서 선교왕이라고 그러는데

아주 듣기 싫은 게 자기는 그냥 무신론자를 기독교신자로 만드는 것은 좀 어려운데 불교신자를 기독교신자로 만드는 것은 아

주 쉽대요. 자존심이 되게 상하더라고요. 그런데 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승려를 기독교신자로 만드는 것은 더 쉽대요. 이거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 많이 들었을 정도로......그러면서 그이의 얘기가 선교의 원리나 영업의 원리가 똑 같대요. 그러면서

연애의 원리와도 똑 같다. 말없이 됩니까?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포교, 외교, 이것은 다 말이 필요하다고 얘기를 합니다.

아마 외교학과라고 서울대학에도 있고 그런데 아마 말 잘하는 기술, 강의를 커리큘럼으로 삼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까지도 듭

니다. 그런데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는데.......라고 했어요. 말이 필요할까요? 우리 금강경 21분에 말이 필요 없다. 사실은 다 구

족되어 있다. 이런 얘기를 우리가 많이 합니다. 여기까지 온 것은 말이 많이 필요한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말은 성공하

지 못합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가다가 영업에 성공한 사람, 외교에 성공한 사람, 포교에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기도 합니다. 얘기

를 하는데 얘기를 잘 들어보면 성공비결은 그 얘기를 들어보지 않아도 제가 더 먼저 말씀드릴 수 있어요. 뭐냐 하면 자기주장

을 내세우려고하면 대개 포교나 영업이나 외교에 다 실패합니다. 내가 말한 것이 아무리 네한테 이익이라고 미사여구美辭麗句

를 쓰더라도 그것이 통할 것 같습니까? 안 통할 것 같습니까? 처음에는 그럴 듯하게 들려요. 너를 위하는 척하지만 실지로는

저를 위해서 꼬드기는 것을 느낍니다. 아무리 바보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이기심을 갖고 영업을 하거나 포교를 하거나 이러면 다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속마음부터 바꾸어야 됩니

다. 이게 우리나라, 우리가정, 우리 회사를 위해서 내가 말하는 게 아니다. 이건 상대한테 좋은 것이다. 실지로 상대를 좋게 하

려고 하는 것이 내가 좋다는 것을 우리는 몰라요. 상대한테 나쁘게 하는 것이 나한테 도움이 된다고 착각을 하면서 영업을 하

면 다 실패입니다.그런데 상대를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나한테 참 이익이 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영업, 외교, 포교를 한다면 대개 성공 을 합니다. 이게 써져있는지 안 써져있는지 모릅니다만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특히 무료급식 체험을 통해서 압니다.

저는 나가는 것이 보시하는 것이 손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실지로 주는 버릇하고 마음까지도 주려고 그랬어요. 주려고 그러

면서 마음속으로는 싹 도로 가져오는 날도둑님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래갖고서는 결국은 부자가 안 됩니다.

실지로 겉으로도 주는 척했지만 속마음으로도 주는 척하고 주는 척하는 게 나한테 손해다. 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진

짜로 보시의 공덕이고 나한테도 이익이 된다는 믿음을 갖고 보시를 해야 됩니다.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가는 것이 바로

들어오는 것이다. 는 것이 느껴집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업을 효과적으로 하느냐? 포교를 효과적으로 하는 사람, 여기에 사장님도 있고 사원도 있고 회사 돈 벌

어줘야지 돈 못 벌어주면 어떻게 되요? 쫓겨나요. 쫓겨나면 대개 사장책임이라고 욕하고 노사분규가 일어나는데 사실은 자기

잘못으로 봐야 됩니다. 자기 잘못으로 알고 회사를 돈 벌어주려고 해야 성공적인 사람이 되고, 건강한 사회인이 되고, 능력 있

는 사회인이 되는 겁니다. 즉 상대의 이익이 내 이익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영업을 하면 성공합니다.

그 나라의 이익이 우리나라의 이익이라고 알고 외교를 하면 성공을 하게 된다. 가정도, 여야도, 야를 위해주는 그런 반응을 할

때 여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하고 야를 설득해야 설득이 되지, 교묘한 말 수단으로써 회유하고, 설득하고 꼬드기려고

해서는 그 대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그걸 아는 게 뭐냐? 그걸 가르쳐 주는

게 뭐냐? 바로 금강경이에요.

금강경에서는 보시를 떠나서 보시바라밀을 주장합니다. 너와 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너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

다. 바로 이런 것을 가르칩니다. 아상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손해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즉 영업, 외교, 포교에서 꼭 갖추어

야 될 요건은 상대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라는 不二의 정신 이것이 꼭 필요하고 不二의 정신을 어디서 가르쳐줍니까? 바로 금

강경에서 가르쳐줍니다.

또 한 가지 손자병법에 이런 게 있습니다. ‘百戰百勝하는 사람은 싸우기 전에 미리 이기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싸우면서 이

기기를 바라는 사람은 거의 다 百戰百敗한다.’ 이런 얘기를 손자병법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은 우리 백선생님의 표

현에 의하면 도인이 하신 말씀이다. 지금도 특히 서양 미국에서 유럽에서 손자병법을 오히려 동양보다도 훨씬 더 인용하고 얼

마전 있었던 트럼프대통령은 손자병법을 가장 애독했던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말은 萬古不變의 진리입니다. 한수 더 뜨

면 ‘금강경은 그보다 더 낫다.’ 이런 말씀입니다.

저는 한참 주역을 공부하려고 했어요. 주역을 한 사람은 주역을 최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백선생님이 그래요. “금강경이 훨씬

낫다.” 그 얘기를 강조하지 않으면 주역으로 가요. 또 손자병법으로 가요. 그러면 안 되죠. 우리는 항상 뭘 잊어버려서는 안 되

죠? 부처님 시봉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금강경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상대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라는 그런 사고방식을 꼭 갖고 외교를 하고, 포교를 하고 영업을 해야 됩니다. 그 뒤에 자신

감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여야간에 서로 토론을 합니다. 누가 이기느냐 하면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리를 합니다. 또

상대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라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익이 됩니다. 자신감을 갖게 하라. 또 상대의 이

익이 나의 이익이라고 하는 불이의 정신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금강경에서 나왔습니다. 주경야선 가행정진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상대의 이익이 내 이익이다. 하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말 많이 안 해도 그이는 벌써 성공이

에요. 그런데 상대의 손해가 내 이익이다. 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주 화려한 달변으로 미사여구를 써서 얘기를

해도 그것은 결국은 성공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금강경을 잘 이해하고 지혜로운 석가여래 같은 분은 말이 필요 없어요. 말하기 전에

㈀ 상대를 위하는 마음만 가지면 저절로 되는 거예요. 또

㈁ 자신감만 가지면 저절로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이는 말이 필요 없는 거예요. 물어볼 때 얘기를 해주는데 그것은 사람을 꼬

드기고 본인이 사람을 많이 거느리기 위해서 얘기해 주는 게 아니라 그이를 위해서 얘기해 주는 겁니다. 자비심을 갖고 얘기해

주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설득효과를 나타내고, 포교효과를 나타내고, 그이로 하여금 진심으로 사람을 바꾸게 해서 인격자로

새로 태어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보이죠. 그래서 결론적으

❹ 대화 전에 갖추어야 할 요건이 있다면 손자병법을 얘기했지만 불이의 정신입니다. 상대의 이익이 내 이익이다. 하는 사고방

식을 갖지 않고 대화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꼬드길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원한 친구가 되지도 않고 진정한 대화의 성공, 영업의

성공을 이룰 수가 없다.

따라서 대화 전에 갖추어야 될 것은 이기심을 없애는 것, 선입견을 없애는 것이 꼭 필요하고,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그것만 갖고는 안 되고 자신감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너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고 당연히 해야 할 나의 부처님이 주신 사명

이다. 이런 자신감으로 할 때 대화는 성공합니다. 속으로 그런 마음만 가져도 이미 성공입니다. 그러니 말이 필요 없어요. 옛날

말에도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이건 굉장히 의미가 깊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어떤 세상이 됐어요? ‘웅변은 금

이다. 침묵은 은도 못되고 동이다.’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말 많이 해야 되고 자기 PR을 많이 해야 되고, 요새는 자기 PR시대

다. 그러죠? 신문방송에 보면 잘난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어요.

❺ 우리는 영원한 효과, 진실한 효과를 추구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의 금강경 해설은 어떠냐? 진실한 능력을 갖추는

것은 상대를 위할 수 있는 마음이에요. 이 능력은 자신감입니다. 이래야 건강한 사람이 되는데 어디서 가르쳐줍니까? 금강경에

서 가르쳐줍니다. 금강경 해석한다는 것은 앞뒤로 말이 딱 들어맞아요? 안 맞아요? 말이 사실 필요하다. 강원형목사는 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아직 어설픈 사람, 탐.진.치가 있는 사람한테만 하는 소리다. 진짜 석가여래 같은 분은 ‘말이 필요 없

다. 無所說이다.’ 이렇게 얘기를 드릴 수밖에 없다.

2부

주경야선 가행정진 하시느라 대단히 수고들 많으십니다. 잠이라는 건 본래 요지부동의 본능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 요지부동

을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알아서는 우리는 모든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밝은 석가여래의 말씀 잠이라는 것은 본능이고 착각이고 본래 없다고 하시니까 그 말씀 잘 깨우치셔서 큰 자유, 지혜를 얻어서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지으시기를 발원 드립니다.

오늘은 금강경 21분 지난번에도 한번 했습니다만 제일 뒷부분의 구절이 또 한 번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이 꼭 필요할 것 같아

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금강경 21분과 비슷한 그러한 금강경이 또한 챕트chapter가 있었습니다. 13분입니다. 13분과 21분은 아주 상당히 유사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부처님은 본래 아무 하실 말씀이 없다하는 그런 말씀 즉 如來無所說이다. 하는 말씀이 특징이고 13분에

如來無所說 그런 얘기가 나왔고 이것은 보통 불자들한테 여래는 49년 동안 수많은 설법을 했지만 실로 한 설법도 한 적이 없

노라.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화두처럼 돼서 많은 불자들이 화두처럼 깨칠 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13분에 화두와 같은 無所說이라는 설명이 또 21분에 나와 있습니다. 21분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無法可說이 是名說法

이니라 이런 식으로 부처님은 정말 할 말이 없다. 내가 49년 얘기한 것도 실로 할 말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다. 이런 뜻으로 해

석이 되면서 참뜻 그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불자들한테 화두로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밝은이 우리 백박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부처님이 본래 할 말이 없다. 라는 말 속에는 중생들의 위대성을 포함하고 있

다. 너희들이 바로 그대로 부처다. 전지전능하다. 전지전능한테 무엇 때문에 깨우쳐주고, 일깨워주고 할말이 뭐가 있겠느냐?

❶ 내가 이야기 한 것은 다 잔소리고 헛소리고 아무 필요가 없는 말이다. 이런 뜻으로 중생의 위대성 즉 부처와 같이 전지전능

한 위대성을 나타내고 있는 표현이다. 이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기하고 있는 것은 너희들이 부처와 같은 위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부처인 줄을 모르면서 스스로 중

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무지하다고 생각하면서 무지를 불러온다. 우리는 부처님께 매달려야만 살 수 있는 아주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한량없는 고통 속에서 산다. 그러면서 행복해지는 방법, 고통에서 면하는 방법을 질문하고 있다. 사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부처님이 보시기에는 그대들은 그대로 위대한 부처일 뿐이다. 그런데 스스로 부처인 줄

모르면서 한량없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쓰는 그대들한테 그 고통을 면해주기 위해서 묻는 말에만 대답했을

뿐이다. 사실은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그 자비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금강경13분, 21분에는 무슨 뜻이 들어 있느냐?

부처님은 아무 하실 말씀이 없다고 하신 그것이 무엇이냐?

많은 불자들은 그것을 화두로 삼아서 그것을 깨치려고 하는데 알고 보면 13분이나 21분에는 상당히 심오한 뜻이 포함되어 있

다. 즉 중생은 그대로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부처 석가여래와 똑 같이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❷ 또 한 가지는 그런 전지전능한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한테 설법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부처인 줄

모르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면서 한량없는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려고 아주 감로수와 같은 법문을 요청을 해요. 그래서 거기에

자비의 마음으로 대답한 것이 설법이다. 즉 자비심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중생들의 위대성과 부처님의 자비성을 13분과 21분에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래무소설이라고 해서

아무 할 말이 없다. 이것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저는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아무 할 말이 없다. 그것을 수보리존자는 알아차립니다.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그 말의 참 뜻은 49년 동안 수많은 법문을

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고 할 말도 없다. 이것의 참 뜻을 우리는 몰라도 수보리는 알아차렸습니다.

그 말 속에는 우리 중생들의 위대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대자 대비한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심오한 뜻

을 알아차리면서 부처님한테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미래세 중생들은 이 말을 듣고 믿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중생들의 위대성과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마음을 알아차

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질문을 한 겁니다.

그랬더니 그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뭐라고 얘기하셨느냐?

그런 중생들이 있다. 모든 중생들은 중생이 아니라 부처와 같다는 그 참 뜻 그리고 부처님은 아무 하실 말씀이 없는 무심한 존

재, 대 자연, 무생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너무 뜨거운 자비심, 중생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대자대비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아 찾는 그런 중생이 있다. 그런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런 사람을 보살화생이다. 이렇게 합니다.

백선생님의 보충설명은 혜능대사와 같은 분이다. 혜능대사 같은 이는 본래 전생부터 잘 닦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던 그런 성자

였었는데 그런데서 태어난 것은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중생의 몸으로 나투셨다고 그렇게 해석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이는 알고 보면 중생이 아니다. 이런 뜻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라는 위대성을 부처님이 아무 할 말이 없다고 하시지만 왜 할 말이 없느냐 하면 다 부처이기 때문에 할 말

이 없다는 그 뜻을 알아차리는 중생 사람이 있는데 혜능대사와 같은 사람이다. 그 사람은 중생이 아니다. 이런 뜻으로 일단 이

해하시는 게 좋습니다.

또 중생이 아니고 보살의 화생일 뿐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백선생님도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 해설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구절은 21분에서 따로 떼어서 지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서 어떻게 하면 석가여래의 위대성과 훌륭한 인격, 탁월한 인격과 철저한 자비심을 우리가 느낄 수 있

게 될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냥 위대하다고 말해서는 부처님을 제대로 아는 게 아닙니다. 위대하기만 하고 자비심이 없다면

우리한테 미치는 영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위대하기만 할뿐만 아니라 자비심도 있다. 자비심만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비는 미세한 부분까지도 철저한 자비심이 있어서 우리들 중생들의 하나하나에 사고방식에도 다 그것을 바꾸어주려는 선호

념, 선부촉으로 이어진다. 이렇게까지 저는 확대해석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알아차리는 중생이 있는 데 이는 보살화생이라고 할 수가 있고 중생이 아니라고 얘기하셨고, 그런데 중생의

모습을 빌어야만 중생을 제도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법문시간에 얘기했습니다. 이건 다른 스님들한테 저는 못 들었는데 중생

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나는 신이고 너희들은 중생이다. 너희들 하고 나하고는 차원이 틀려, 너희들은 나한테 절대로 공경해야

돼, 절대로 복종해야 돼, 이렇게 고압적으로 나간다면 정말 그 인격을 존중할 이런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부처

님이 이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너무 뛰어난 모습 부처님의 아주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대요. 그것을 보여주면 소

화할 능력이 없어요. 아! 부처님은 부처님대로 얘기하세요. 우리는 우리 살길로 살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실 예가 제가 손선생님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분들은 신통력을 나타내지 않는답니다. 부처님이 참 위대하다. 너희들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르지 그러면서 부처

님은 초능력도 나타내고 신통력도 나타낸다. 부처님이 신통력을 나타내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신심 발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도망갈 것 같습니까? 우리는 신심 발심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도망간대요. 부처님은 아! 저렇게 위

대하다. 그래서 금강산 제자들이 그래요. 손선생님이 한번 신통을 나타냈더니 그 뒤에는 더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가 중생을 제도할 때는 꼭 반보 앞, 비슷하게 행동을 해야 된대요.

비슷하게 행동을 하다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산뜻한 것 하나씩을 보여준대요. 나는 너희들하고 똑 같은 줄 알지만 맞

먹으려고 하지 마라. 알기 쉽게 얘기하면 그런 겁니다. 일깨워주고 그리고 또 따라와요. 따라 오다보면 인제 못 따라갈 것 같으

면 또 그 비슷한 행동을 하면서 또 반보씩 앞서 가야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오시더라도 부처님의

모습인지 모른대요. 부처님이 바로 옆에 있어도 모른대요. 왜냐하면 너무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 중생들이 접근하지 않기 때문

에 그래서 혜능대사 같은 이도 제가 해석하기로는 그렇습니다. 보살 화생으로 왔지만 일자무식꾼이 됐고, 이런 모습을 보여서

너희들하고 비슷했다가 나는 닦아서 밝아졌다. 이렇게 해야 따라오지 나는 본래부터, 태어날 때부터 대단해. 이렇게 되면 아무

도 오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중생의 모습을 보여야만 밝아질 수가 있기 때문에 중생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중생이 아님도

아니니라. (須菩提야 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 이렇게 저는 해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석을 해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야! 부처님이 참 자비로우시구나. 위대하시구나가 아니라 자비스러우시구나. 이런 대

단한 인격자로 본다. 부처님은 위대하시기도 하지만 위대하다 그러면 우리는 따라가지 않습니다. 정말 자비로운 인격자로구나.

따뜻한 어머니와 같은 그런 인품이 느껴져야 우리가 따라가지 대단하고, 기적을 나타내고. 신통만 나타내서는 너무 어려워서

우리는 따라가지 않는다. 이런 뜻입니다.

衆生衆生者는 如來說 非衆生이 是名衆生이니라 중생이 아님도 아니니라. 사실은 중생은 본래 없다. 다 부처다. 석가여래가 얘

기하고 싶으신 것은 그것이에요. 그럼 중생은 너희들이 부처인 줄 모를 때 중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衆生衆生者는 중생이 있다고 하고 중생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대들이 부처인 줄 모른다. 라고 생각할 때만이 중생이 존재하

는 것이지 중생이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요렇게 저는 해석하고자 합니다.

須菩提야 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衆生衆生者는 如來說 非衆生이 是名衆生이니라

그런데 왜 이런 해석이 필요 하느냐?

중생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저도 곧잘 그럽니다. 이 세상은 성자만 살지 않는다. 성자만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넌센스

다. 알고 봤더니 나쁜 놈들도 무척 많더라. 나쁜 놈도 아주 고약하게 나쁜 놈들이 많더라. 배신자도 아주 철저한 배신자도 많더

라.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부처의 눈에는 절대로 배신자가 보이지 않는다. 악인이 보이질 않아요. 금생만 보니까 악인이 보이고 배신자가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과 같은 지혜로운 이는 금생만 다가(전부) 있는 것으로 알지 않습니다. 전생부터 쭉 봅니다. 그럼 그네들

이 악인으로 보이고 배신자로 보이는 것은 전생에 그런 원인에 의해서 저 사람이 악인이다. 하는 것은 우리는 악인이다. 하고

배신자라고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저 사람한테 내가 전생에 배신을 한 것으로 금생에 내가 당하는 거예

요. 그런데 자기 잘못은 생각을 안 하고 전생은 모르니까 전생에 내가 잘못했어요. 그런데 그이는 내가 잘못한 것을 앙심을 품

고 금생에 배신을 한 거예요. 그런데 전생을 못 보니까 금생에 배신자라고 보고 악인이라고 보고 이 세상에 나쁜 놈들이 많다.

오탁악세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전생을 훤히 아는 분들은 그들이 악인이라고 보질 않습니다. 전생에 한을 품고 한 풀이 하는 것뿐이다. 한풀이 하는 능

력을 발휘할 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오탁악세다. 말세다. 이런 소리 하지 않습니다. 오탁악세다. 말세다. 나쁜 놈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금생밖에 못 보는 편견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의 판단이다. 전생부터 훤히 알고 보면 아! 그것은 할 짓을 한다. 당연

한 것이다. 우리가 자주 얘기하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부처님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도 나쁜 사람이 없어요. 이 세상은 오탁악세고 말세고 이게 아닙니다. 질서정연한 세계로 보인다

는 겁니다. 그것은 전생을 훤히 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나쁜 놈이 없고, 중생이 없고 오로지 다 부처의

눈에는 전생을 훤히 알기 때문에 부처의 위대한 神通妙用만 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너희들이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생밖에 못 보는 데서 나온 편견에 불과하다. 너희들도 수도해서 전생을 훤히 봐

라. 그대들 눈에는 다시는 중생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금생만 보고 중생중생 하지 마라. 알고 보면 중생이 하나도 없는 것

이고 다 부처의 세계만 보이는 것이다. 인제 요렇게 저는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석을 해야만 우리 자신이 부처인 줄 알고 이 세상은 나쁜 사람이 많은 이런 사바세계라고 해석하는 이런 사고방식에

서 벗어나서 이 세상은 사바세계고 苦와 樂이 반반씩 있는 게 아니라 그대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라는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

할 수 있다. 이렇게 제가 얘기합니다.

저는 22분을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 금강경을 새롭게 한번 조명을 해 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썼습니다.

2. 금강경을 통해서 본 석가여래의 특성이 3가지가 있습니다.

❶ 하나는 위대성입니다. 위대성을 나타낸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4분에 보면 무주상보시는 기복덕은 불가사

량이니라. 그것은 나도 무주상보시를 해봤더니 불가사량의 공덕을 체험해봤다는 뜻도 되고, 그대들도 무주상보시를 하면 불가

사량의 공덕을 체험했다. 이런 뜻이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위대성을 나타냅니다. 중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참나’의 위대성을

얘기하신 것입니다. 불법의 위대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5분에는 즉견여래니라.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수도를 하면 바로 참 불성을 보는 것이니라.

6분에 보면 이 경의 무량공덕을 얘기합니다.

8분에도 무량공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11분에도 금강경을 읽으면 무량무변공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수도하면 그대들 마음속에 절대의 세계 무량한 절대공덕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얘기를 하고 내가 그것을 체험했고, 너희들도 금강경을 읽으면 그런 것을 체험할 수 있

다. 즉 부처님의 위대성, 참나의 위대성,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는 이런 위대한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 신의 나라가 있다. 그것을

설명한 겁니다.

그런 것들을 한번이 아니라 4,5,6,8,11,12,13,14.15.16,24,32분에 걸쳐서 쭉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위대성을 나타낸 것 이외에

부처님의 대자대비 이런 깨달음의 세계를 꼭 일러주고 싶어서 일러서 중생들로 하여금 절대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간

절한 마음 즉 자비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되며 부처님의 어떻게 보면 위대한 인격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됩니

다.

그런데 인제 우리 금강경을 보면 부처님의 위대성을 느끼고 ‘참나’의 위대성을 느끼지만 자비심을 느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소견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정말 위대성만 있는 게 아니라 탁월한 인격, 대자대비한 정말 따뜻한 어머니 이상의

그런 자비심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동시에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13분과 21분에도 포함되어 있는데

❷ 저는 열반경을 아주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학생 때 읽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1965년인가 열반경이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

이 돼서 나왔어요. 상.하 권으로 나왔는데 굉장히 양이 방대해서 마치 그 양은 지금 바이블 신.구약을 다 합친 그런 분량이 되

었는데 1965년에 제가 너무나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어떤 구절이 감동이 되었느냐 하면 아함부, 방등부에는 그런 게 없습니

다. 특히 열반경에는 이 보살, 즉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그런 마음을 아주 실감나게 적나라하게 표현을 합니다.

즉 어느 정도 대자대비하시느냐 하면 이런 표현이 나와요. 衆愛子 중생들이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 죄송하지만 우리 옛날부터

여성보다는 남성을 우위로 하는 남존여비사상이 있고 또 외아들은 부모님이 가장 사랑합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외아들을 사

랑하는 우리의 조선시대 그런 풍조가 있었습니다만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보다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석가여래

가 그렇게 중생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금강경을 읽으면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4,5,6,8,11,12,13,14.15.16,24,32분에 걸쳐서 자꾸 강조가 되고 있고 이 13분, 21분 제가 말씀드립니다만 부처님의 대자

대비를 저는 좀 느낍니다. 그런데 열반경에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어요. 중생이 이렇게 지옥 속에서 고통을 받아요. 지옥

에 가야 지옥이 아니라 우리 금생에도 남한테 경천 당하잖아요? 그리고 숨막 힐 것 같은 아주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신 적이 아

마 있었을 겁니다. 경천을 당하거나, 시험에 낙방을 하거나, 남한테 무시당하거나, 그런 체험이 없으면 말이 안 되죠. 그럴 때

아주 죽고 싶은 정도로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이 중생이 괴로워할 때 보살은 어떠냐 하면 털구멍 하나하나에서 피가 난대요. 부모도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 장래성 있는 외아들 사랑하는 것 이상의 부처님은 자비심이 있다는 것을 열반경에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

니다.

저는 그 열반경을 또 찾아서 읽었는데 너무 양이 방대해서 지금 읽으라고 해도 안 읽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금강경에 너무 취

미를 붙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때 열반경을 읽었을 때 열반경이 최고의 가르침으로 알았고 거기에 부처님의 위대

성이 아니라 대자대비한 이런 것을 참 실감나게 느끼게 되게끔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정말 부처님이 자비하실까? 저는 우리 백선생님을 보면 굉장히 자비로울 때는 자비롭지만 싸늘할 때는 아주 쌩하고 싸늘합니

다. 네가 알아서 네가 처리해, 꾸중도 합니다. 매달리고 그래도 냉정하게 자르시고 그런데 그게 냉정해서 자른 게 아니더라고

요. 그렇게 해야만 버릇이 서기 때문에 냉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냉정은 진짜 보통 사람들의 냉정과는 틀립니다.

정말 큰 사랑 때문에 냉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백선생님께서는 냉정하고 매질도 하고 그런 것은 미워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었던 것을 저는 느낍니다. 정말 사랑의

매라는 게 있고요. 자비의 매라는 게 있고요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중생의 고통은 바로 털구멍하나하나에서 피가 나

는 이런 사랑이기 때문에 추상같은 호령이 꼭 필요하다. 그런 추상같은 호령 즉 어떻게 보면 우리가 백은대사의 사랑이나 똑

같습니다. 변명 안 하시잖아요. 변명을 안 하고 모든 수모를 견디는 것은 자기가 변명하면 그 중생은 죽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가 고통을 당하더라도 입을 벌리지 않는 우리 백은대사의 사랑을 느끼듯이 부처님의 사랑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열반경에서

느꼈는데

그게 금강경에 나타나 있어요. 13분, 21분, 지금 21분을 얘기한 것이지만 無所說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무 할 말이 없다고

그래서 냉정하고 대자연은 말이 없다. 대자연은 말이 없죠? 그건 무생물이다. 대자연은 무생물이다. 우주는 무생물이다. 대자

연도 무생물이 아니래요. 대자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언의 설법 無言之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

지만 대자대비의 그 가르침을 주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아마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하실 거예요. 아무 할 말이 없다. 그런 표현

을 썼습니다만 그대들이 너무나 위대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일깨워주는 자비의 법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묻는데 따라서는 절대로 소홀하지 않고 얘기를 해 주시면서 그것은 수기 설법이기도하지만 수기설법은 냉정한 설법이

아닙니다. 묻는 것만 얘기해 주시고 덤으로 더 해주시지는 않는다. 또는 물을 때만 대답해준다. 너무 인색하시다. 묻지 않아도

가서 좀 따뜻하게 얘기해주시고 보채면 달래주시고 왜 이러시지 않느냐? 우리는 그런 걸 바라죠? 꼭 물을 때만 대답을 해 주

시는가. 그런데 물을 때만 대답을 해 주셔야 돼요. 묻지 않을 때도 자꾸 추근추근와서 믿어라. 믿어라. 이렇게 하면 도망가요.

그러니까 정말 발심하기 위한 대자대비의 설법은 꼭 물을 때만 대답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모르죠?

그러니까 여기 13분과 21분에 無所說이라는 것은 無所說이라는 속에는 수기설법도 됩니다. 석가여래의 대자대비한 마음이 꼭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대자대비하지만 거저 두루뭉술하게 거칠게 대자대비가 아닙니다. 미세하게까지 대

자대비가 다 미친다는 것,

❸ 즉 자비심이 있지만 미세한데까지 부처님의 자비의 손길이 미친다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선호념善護念, 선부촉善付

囑입니다. 선호념善護念, 선부촉善付囑은 13.14.17.20.21.31분에 표현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예요?

뭐냐 하면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오죠? 如來說第一波羅蜜이 卽非第一波羅蜜일새 是名第一波羅蜜이니라 14분에도 그런 게 나오

고, 17분에도 그런 게 나오고 20분에 卽非具足色身일새 是名具足色身이니이다 그런 말이 나오고 21분에 彼非衆生이며 非不衆

生이다 할 때도 그런 표현이 나오고 31분에도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은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

見壽者見이니이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을 갖고 별 소리를 다 해요. 변증법이다. 삼단논법이다. 그런데 이게 그게 아닙니다. 대자대비한 마음이지만 미세한 부분까

지도 다 적용되는 표현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즉 선호념善護念, 선부촉善付囑이다. 善이라는 것은 미세한 부분까지도 다 마

음으로만 자비심을 내는 게 아니라 실지로 행동으로까지도 나타낸다.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사고방식을 일일이 깨쳐줘요. 우리는 수시로 잘못된 사고방식에 물들고 잘못된 사고방식에 물들면 한

량없는 무지와 고통과 무능력을 불러옵니다. 그러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겁니다. 병, 외로움, 빈곤 속에서 신음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런데 如來說第一波羅蜜이 卽非第一波羅蜜일새 하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 사고방식을 바꿔라. 너희들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중생적인 사고방식을 부처님 사고방식으로 바꿔라. 요렇게 얘기

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느냐 하면 13.14.17.20.21.31분에도 나오고 이렇게 자꾸 나오는 것은 수시로 잘못된 사고방

식에 빠져 들어가니까 그때마다 정말 따뜻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것을 바꿔주려는 석가여래의 자비심을 느끼게 합니다. 저는

잔소리로 들리지 않고 왜 한 소리를 또 하고 또 하시나, 인제 한번 했을 때 다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이렇게 하면

서 스승의 잔소리를 싫어하고, 부모님의 잔소리를 싫어하는 아들들이나 제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석가여래도 한 소리를 또

하세요 간단하게 해주면 또 너무 간단하게 해 주면 또 싱거워 해요 아이! 뭐 그렇게 대충 하시고 우리가 천재에요? 좀 자세히하세요. 간단하게 해주면 또 너무 간단하게 해 주면 또 싱거워 해요. 아이! 뭐 그렇게 대충 하시고 우리가 천재에요? 좀 자세히

일러주세요. 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저는 잘 몰랐어요. 이게 금강경 자꾸 읽다보니까 정말 미세한 부분까지 우리는 수시로 잘못된 사고방식에 물들기

쉬운데 그때마다 지적을 해 주시는 거예요. 如來說第一波羅蜜이 卽非第一波羅蜜일새,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은 卽非我見人

見衆生見壽者見일새 그런 게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니라 卽非一切法일새 是名一切法이니라 우리는 수많은 잘못된 사고방식에

무시겁으로 익숙해지면서 그로 인해서 한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때마다 지적을 해 주십니다. 그래야 밝아지기 때문입니

다.

그게 석가여래의 자비심이지만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선호념善護念, 선부촉善付囑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대중 : 아직은 잘

모르겠다.) 저도 잘 못 느꼈는데 이제 와서 좀 느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면서 금강경을 읽는다면 금강경을 읽을

때마다 부처님의 위대성, 자비심, 그리고 선호념, 선부촉을 느끼면서 이렇게 되면 밝아질 수밖에 없다. 아마 이렇게 판단이 나

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런 느낌이 자꾸 든다면 어떤 분의 예를 들어서 저이는 금강경만 펴놓기만 해도 금강경을 펴놓기만 해도 골

이 지끈지끈 아프고 잠이 옵니까? 대개 그렇죠? 그런데 아! 이거 또 7독을 해, 7독을 언제 끝내. 이런 생각이 듭니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나 봐요. 금강경만 펴놓으면 아주 저절로 시원해진대요. 한번 읽으면 더 환희심이 나겠죠. 그런 분도 있는 모양

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처음에 금강경만 펴 놓으면 졸음이 오고 7독을 언제 끝내나 이런 생각이 올지 몰라도 자꾸 하다보면 아

마 펴 놓기만 해도 부처님의 선호념善護念, 선부촉善付囑을 그대로 느끼면서 골이 아주 시원해지는 아마 그런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수도를 하면 아마 그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이 금강경이 무생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밟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안 그렇대요. 그

리고 무생물은 하나도 없어요. 화엄경에 그랬어요. 有情無情 實有佛性이다.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고 그럽니다. 금강경 소리만

들어도 합장해야 되고, 금강경 책을 봐도 고이 모셔야 되고, 여기 부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공경심을 내야 되고 그

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금강경 21분에 보이지 않는 이면의 뜻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_()()()_

제도하시는 영산교주 석가모니불 시봉을 잘 하겠습니다.

제도하시는 용화교주 미륵존여래불 공경을 모든 분들이 세세생생 선지식 모시고부처님 전에 환희심 내어 부처님 시봉을

밝은 날과 같이 복 많이 짓기를 발원합니다. 미륵존여래불 미륵존여래불 미륵존여래불 _()()()_